상상력공학/요재지이(聊齋志異)

[요재지이] 홍옥과 상여

강인태 2022. 12. 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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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여윈 상여는 늙은 아버지와 둘이 괴죄죄하고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상여가 달을 보고 있자니 담 너머 나무 위에 웬 여자가 하나 앉아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피니 역시나 한 미모하는지라 상여는 사정사정하여 여자를 안으로 들여 정을 나누었다.

그렇게 둘은 깊은 사이가 되어 매일같이 여자는 담을 넘어 들어왔는데,

결국엔 그 소리가 잠든 상여의 아버지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네 이놈. 집안이 이꼴이 되었는데, 밤마다 방탕한 짓거리나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리고 처자는 혼례도 치르지 않은 마당에 담을 넘어들어와 남자와 정을 통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아버지의 호통에도 상여는 여자를 붙들었지만 오히려 여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홍옥이라 하옵니다.

우리가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고 있었으니 계속 이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는 떳떳이 혼인할 수 없는 몸이니 제대로된 처자를 아내로 맞이하십시요.

마침 제가 봐둔 여인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지참금을 한푼도 마련할 수 없으니 아내를 맞이하는 건 무리요."

 

"이 돈이면 해결될 것입니다."

 

여자는 은자를 사십 냥이나 내주었다.

 

다음 날 상여는 여자가 일러준대로 오촌이란 마을에 사는 위씨를 찾았고,

머뭇거리던 위씨는 상여가 내민 은자 사십 냥에 흔쾌히 미모의 딸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혼례를 올리고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며 아들까지 낳아 복아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이 지속되면 흉사가 생기는 법.

근처에 살던 송씨 성을 가진 인간은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 비위가 들통나 내려왔는데,

은둔한 뒤에도 여전히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어느날 길을 가던 송가의 눈에 상여의 아내가 들어왔고,

송가는 다짜고짜 값을 후하게 쳐줄테니 아내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말을 들은 상여와 그 아버지가 호통을 치며 거절하자,

송가는 사람들을 시켜 상여와 아버지를 두드려 패고 아내를 업어가버렸다.

심한 매질과 화를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그대로 앓아누워 세상을 저버렸고,

상여는 어린 아들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현청을 찾아가 호소했지만,

송가의 위세에 눌린 관아들은 상여의 호소를 한귀로 듣고는 흘려버렸다.

 

그렇게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송가 앞에 조문을 한닾시고 한 사내가 나타나더니 호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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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그런 꼴을 당하고 복수할 생각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가?"

 

"그러고 싶지만 이 어린 것 때문에 어찌할 방도가 없소.

혹여 이 아이를 맡아줄 수 있겠소?

그러며 당장 가서 송가 그놈을-"

 

"아이를 기르는 일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차라리 내가 복수를 해줄테니 아이는 당신이 계속 키우시오."

 

그러고는 이 일면식도 없는 우락부락한 남자는 한밤중에 송가의 집으로 숨어들어,

송가와 그의 아들 둘에 며느리와 하인까지 죽여버렸다.

송가의 남은 자식들은 이것이 상여의 짓이라 생각하고 관가에 고발했고,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던 상여는 결국 붙잡혀 옥살이를 하게되었는데,

그 와중에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상여의 억울한 호소에도 그에게 하옥을 명한 현령이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비수가 날아들더니 그의 침대 머리맡에 꽂혔다.

목숨을 잃을뻔한 현령은 정신을 차리고 상여의 억울함을 헤아리고 그냥 풀어주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아내와 아버지가 죽은데다 아이까지 잃어버린 상여는 슬픔에 빠져 죽지못해 살아가는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 찾아온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한 여인이 아이를 데리고 서있었다.

 

"뉘시오?"

 

"그렇게 큰 일을 치르시고-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여자의 말에 자세히 보니 그녀는 다름아닌 아내를 소개해주었던 홍옥이었다.

 

 

그녀는 옆의 아이를 보며 말했다.

 

"자 아버지에게 인사해야지."

 

여자의 뒤에서 고개를 내민 아이는 다름 아닌 잃어버렸던 상여의 아들 복아였다.

 

"그세 아버지를 잊어버린 게냐?"

 

쭈삣거리며 나서지 못하는 아이의 등을 밀어 부자상봉을 시킨 홍옥이 말했다.

 

"이제 그만 가볼게요."

 

"아니 잠깐만-"

 

매정하게 돌아서는 여인을 붙들며 눈물을 흘리는 상여를 본 홍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사실 저는 여우인데, 당신에게 반하여 담을 넘어든 것입니다.

아버님의 호통에 어쩔 수 없이 떠났었지만 이제 당신 옆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집안 일은 제가 알아서 할터이니, 당신은 그냥 글공부에 다시 집중하세요."

 

그날부터 홍옥은 집안을 일으켜 풍족한 생활이 이어졌고,

복권이 된 상여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한편 늙어가는 상여에 비해 홍옥은 삼십이 넘어도, 사십이 넘어도 늘 스무살 같은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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