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공학/요재지이(聊齋志異)

[요재지이] 천녀유혼

강인태 2022. 12. 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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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신은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어서

 

"내 평생 여자는 아내뿐이다."

 

라며 사람들에게 공언하곤 했다.

 

어느날 영채신은 금화성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묵을 곳을 찾았지만 

성 안의 숙소는 방값이 너무나 비싸 성 북쪽에 있는 빈 절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문이 잠긴 탓에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날이 저물고서야 한 사람이 나타났다.  

영채신은 얼른 인사를 하며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는데

 

"저도 여행중인 사람입니다. 

이곳은 주인이 없어 썰렁한 절이니 함께 지내주시면 저도 감사한 일이죠.

저는 연생이라 합니다."

 

영채신은 잠자리에 들었지만 낯선 탓인지 좀처럼 남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창틈으로 쳐다보니,

한 노파와 여자 하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천이 왜 이렇게 안 올까요?"

 

"올 때가 다 됐어."

 

"기분이 안 좋아보이던데 별일은 없었죠?"'

 

"없었어. 그 놈의 계집애에게 너무 끌려다니지 말자고."

 

그때 한 아가씨가 나타났는데, 역시나 절세미인이었다.

영채신은 그만 호기심을 거두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시 시간이 흐르자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어느새 조금전에 봤던 절세미인인 자신에게 기대옸다.

 

"달빛이 너무 좋아 도무지 잠이 오질 않네요.

당신과 사랑을 나누면 참 좋으련만-"

 

절세미인이 요염한 눈빛과 목소리를 보내왔지만 영채신은 단호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한번의 실수로 염치와 도리를 모두 잃어버려서는 아니되오."

 

"한반중인데 아무도 모를 거예요."

 

"어서 가시오. 내가 고함이라도 질러야겠소?"

 

그제야 여자는 물러갔다.

하지만 조금 뒤 여자가 다시 나타나더니 이번엔 황금을 한 덩이 내밀었다.

영채신은 이번에도 단호했다.

 

"외롭지 않은 재물로 내 호주머니를 더럽히지 마시요."

 

영채신의 호통에 여자는 부끄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물러갔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다른 다방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영채신과 연생 이외에도 또 한 서생이 하인을 하나 데리고 왔는데, 간밤에 죽어버린 것.

서생은 발다닥 가운데 송곳 같은 것으로 찔린 구멍이 난 채 핏기가 가신 얼굴로 죽어있었다. 

하인 역시 핏기 없는 얼굴에 숨만 겨우 붙어 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숨을 거두어버렸다.

 

볼일은 마친 영채신은 또다시 절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는데,

간밤에 찾아왔던 여자가 나타나 다급하게 말했다.

 

"당신처럼 심지가 굳은 선비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열이면 열 제 유혹에 넘어왔었는데-

저는 섭소천이라 하는데 열여덟 살에 요절하여 이 근처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요물들이 저를 협박해서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유혹하여 그들에게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절에서 자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습니다.

제가 나서지 않아도 그 요물들이 와서 당신을 해칠 것이니 걱정이 되어 이렇게 왔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소?"

 

"연생과 한방에서 주무십시요. 

연생은 보통사람이 아니라 요물들도 그 방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요물들이 사람을 어떻게 해친 게요?"

 

"저와 관계를 가진 사람은 정신이 혼미해진 틈에 발바닥에 구멍을 뚫고 피를 빨아먹습니다.

황금을 받아든 사람은 황금이 나찰의 뼈다귀로 변해 그의 심장과 간을 도려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어허 그런 못된 일을-"

 

"저도 더 이상 이렇게 나쁜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제 뼈를 거두어 멀리 조용한 곳에 묻어주신다면, 

이 요물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채신은 그러겠노라 약속을 한 뒤 얼른 짐을 챙겨 연생의 방으로 갔다.

예상과는 달리 연생은 같은 방을 쓰자는 영채신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영채신으로서는 이것저것 따질 입장이 아니었다. 

염치불구하고 그의 방에 들어가 자리를 깔고 누워버리자 연생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르자 방밖에서 이상한 기척이 들려왔다.

이윽코 장에 그림자가 어리더니 방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갑자기 연생이 가지고 왔던 보자기에서 빛이 나더니

그 빛줄기가 그림자를 향해 곧장 날아가 돌로 된 창살에 부딪히더니 되돌아왔다.

그러자 창밖의 그림자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연생이 일어나 앉자 영채신도 따라 일어나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저는 사실 검객입니다. 요물들을 잡아들이는 게 제 일이지요.

보자기 속에 든 것은 제 칼인데 요물들을 죽일 수 있는 물건입니다.

창살에 부딥히지만 않았다면 요물이 죽었을 것인데, 아쉽게 상처만 입히고 말았네요."

 

연생은 영채신에게 칼을 담았던 가죽주머니를 선물로 주며

 

"악귀들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날이 밝자 영채신은 연생과 함께 섭소천의 유골을 찾아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 들판에 이른 영채신은 그녀의 유골을 조용한 곳이 묻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제사를 마친 영채신이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아뿔싸 섭소천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있었다.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큰 은혜를 입었으니 평생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당장 거절하려던 영채신은 밝은 햇살 아래 서 있는 섭소천의 미모에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온 영채신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는데-

 

"아가씨가 우리 아들을 위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아들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는데다,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귀신과 결혼시킬 수는 없소."

 

"부부의 연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라버니로 모시겠습니다."

 

섭소천의 말에 영채신의 어머니가 하는 수없이 허락하자

그녀는 아픈 영채신의 아내를 대신해 영채신과 그의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렇게 1년이 흘러가자 중병이 들었던 영채신의 아내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오랫동안 섭소천을 지켜본 영채신의 어머니는 그녀가 귀신이라는 사실마저 무뎌진 바람에 결국 그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날 섭소천이 영채신에게 다급하게 다가와 말했다.

 

"연생이 주었던 가죽주머니를 가지고 있는지요?"

 

"가지고 있소만 그 주머니를 무서워하지 않았소?"

 

"이제 저는 사람과 가까이 지낸지 오래되어 괜찮습니다.

무언가 기운이 좋지 않으니 그 주머니를 머리맡에 걸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요물이 저를 쫓아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자 결국 요물이 나타났는데-

눈에서는 이글이글 불꽃을 내뿜고 새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영채신과 섭소천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가죽주머니가 큰 소리를 내면서 커지더니 그 안에서 귀신 하나가 몸을 쑥 내밀더니, 

찾아온 요물을 붙들고 도로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잠시 울룩불룩 하던 가죽주머니가 결국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자 섭소천이 말했다.

 

"이제는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과 귀신 커플임에도 아들을 둘이나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영화 '천녀유혼'의 모티브가 되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영채신=장국영, 섭소천=왕조현 이렇게 캐스팅된 그 시절의 명작이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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