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생이란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여자가 혼자서 보따리를 들고 바쁜 걸음을 걷는 것을 보았다.
보따리가 무거워보여 도와줄 요량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여자는 열 다섯 살쯤 되어보이는 예쁜 아가씨였다.
첫눈에 반한 왕생이 물었다.
"어인 일로 동이 트기도 전에 혼자서 길을 재촉하는 겁니까?"
"어차피 도와주시지도 못할 것을 뭐하러 물으십니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테니 말해보시요."
"저희 부모가 저를 부잣집에 팔아넙겼는데,
본부인이 질투가 심해 저를 하루종일 괴롭히는 바람에 도망치는 중입니다."
"어디로 가려구요?"
"집 나와 도망치는 사람에게 목적지가 있겠습니까?"
"그럼 우리집으로 갑시다."
왕생의 권유를 여자가 흔쾌히 받아들이자,
왕생은 그길로 여자를 자기집 서재에 숨겨두고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집안에 사람을 숨겨두는 것이 녹녹치 않아 그는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내는 괜히 부잣집과 엮여 화를 당하지 말고 내보내라고 했지만,
여자에게 반한 왕생은 아내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어느날 왕생이 저자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도사가 다가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요?"
"그게 무슨 말이요? 나는 아무 일도 없는데-"
"분명히 화가 닥친 기운인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소?"
"아무 일도 없소. 갈 길이나 가시오."
"어리석은 자로구만! 쯔쯔."
도사의 말에 왕생은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여자의 미모는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길로 집으로 돌아온 왕생은 서재로 찾아가니 문이 잠겨 있었다.
도사의 말에 가슴 한 구석에 의심이 자리잡은 그는 몰래 담을 넘어 가서 안을 들여다봤는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난 푸른 색 귀신이 흉측한 모습으로 서서 붓을 들고 있었다.
귀신은 침상에 가죽을 펴놓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더니,
잠시 후 그 가죽을 뒤집어 쓰자 아름다운 여자로 변했다.
그 모습을 본 왕생은 황급히 다시 도사를 찾아나섰는데-
어렵사리 도사를 만난 왕생이 상황을 이야기하자
"제가 쫓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놈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것이니 죽일 수는 없고-
이 승불을 침실 문전에 걸어두면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놈도 포기하고 물러날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왕생은 서재가 아닌 본채 안방으로 들어와 승불을 걸어뒀는데-
한참 뒤에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겁이 난 왕생은
아내에게 바깥을 살펴보게 했다.
"바깥에 귀신이 왔는데 이를 갈기만 할 뿐 더 다가오지는 못합니다.
이제 떠나는 군요."
왕생이 아내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또다시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도사놈이 이런 수를 썼다 이거지?
그래도 입속까지 굴러들어온 먹이를 그냥 둘 수는 없지."
귀신은 승불을 찟어버리고 침실 문짝을 부수더니 그대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왕생이 얼어붙은 사이 귀신은 그의 심장을 끄집어 내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왕생의 처 진씨는 왕생의 동생인 이랑에게 이 일을 의논했고,
이랑은 얼른 도사를 찾아갔다.
이랑과 함께 왕생의 집으로 온 도사는 사방을 살피더니
"아직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구만- 저 남쪽 집은 누구 집이요?"
도사가 가리키는 집을 본 이랑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제 집입니다."
이랑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과연 이날 아침 한 노파가 찾아와 허드렛일을 시켜달라고 했다고.
도사는 칼을 빼들고 외쳤다.
"이 못된 귀신아. 썩 나오거라."
귀신이 나오자 도사는 재빨리 칼을 휘둘렀고,
그의 칼을 맞은 귀신이 쓰러지자 사람 가죽이 훌러덩 벗겨졌다.
그것을 본 도사는 호리병을 꺼내 귀신을 그 안에 가두더니,
가죽을 둘둘 말아 들고는 그대로 길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왕생의 아내인 진씨가 다가와 그를 붙들고 사정했다.
"제 남편 좀 살려주십시요."
"저는 도술의 깊이가 얕아 죽은 이를 살려낼 재주까지는 익히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진씨는 한사코 그를 붙들고 사정을 했다.
"정 그렇다면 저자에 가 쓰레기더미에 드러누워잇는 미치광이를 찾으십시요.
그 사람에게 살려달라 매달리면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이 무슨 모욕을 주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도사의 말에 진씨가 저자에 달려가니 그의 말대로 한 미치광이가 쓰레기더미에 누워있었다.
"제 남편 좀 살려주세요."
진씨가 매달리자 미치광이가 말했다.
"이렇게 매달리는 걸 보니 나한테 반했나 보구만."
진씨는 자초지종을 말하며 살려달라고 애워했다.
"내가 무슨 염라대왕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낸단 말인가?
그깟 남편, 그냥 아무 사내나 남편으로 삼고 살아."
말을 뱉은 사내는 다짜고자 진씨에게 모진 매질까지 가했다.
그런데도 진씨가 꾹 참고 애원하자 사내가 말했다.
"그러면 이거나 먹어. 캬르륵 캭!"
사내는 입 안 가득 가래를 모으더니 손에 탁 뱉아서 진씨에게 건냈다.
순간 당황한 진씨는 숨을 꽉 참고는 가래를 받아 삼켰다.
그러자 사내가 사방을 돌아보며 외쳤다.
"내 침까지 받아먹다니. 정말 나를 좋아하나 보구만."
사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진씨는 그의 뒤를 쫓았는데,
남자는 한 사당으로 들어가버렸다.
진씨는 냉큼 사당 안으로 따라 들어갔지만 남자는 온데 간데 없었다.
낙담한 진씨가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의 시신은 오장육부가 튀어나온 채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밀려운 설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갑자기 욕지기기 치밀더니 가슴에 걸려 있던 뭔가가 훅 튀어나와서는 남편의 찟어진 뱃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사람의 심장이었고,
어느새 남편은 핏기가 돌더니 되살아났다.
(이야기를 보는 내내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바람 난 낮짝 두꺼운 남편인데,
그런 인간을 위해서 뭘 이렇게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요재지이를 쓴 포송령 마저
그런 주석을 달아뒀네요.
'어리석고 막 되먹은 인간을 위해서 아내까지 모욕을 참다니...
하늘의 이치가 무색하구나' 하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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