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양 땅에 섭씨 성을 가진 서생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랐지만 관운이 없는 탓인지
이상하게도 시험만 보면 떨어져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따.
회양현의 현령으로 부임한 정승학은 섭생의 소문을 듣고 그를 초대했는데,
이야기를 나누어보고는 아주 기뻐하며 그의 후원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정승학은 관아에서 학자금을 받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섭생의 생계가 궁핍해지지 않도록 수시로 돈과 양식을 대주기까지 했다.
정승학의 후원에 힘입어 섭생은 드디어 과거에 응했는데,
정승학이 그의 답안지를 구해보니 단연 일등감이었다.
하지만 섭생의 부족한 관운 탓인지 이번에도 합격자 명단에서 빠져버렸다.
자신을 밀어준 후원자에게 실망만 안겼다는 자괴감에
섭생은 결국 병이 들어 시들시들 앓아누워버렸다.
정승학 역시 윗사람에게 잘못 보여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내가 동쪽으로 갈 날짜를 받아놓고도 못 떠나는 것은 당신이 같이 갔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부디 어서 쾌차하여 같이 갑시다."
하며 정승학은 섭생에게 같이 가기를 간곡히 청했지만,
앓아누운 섭생으로서는 먼길을 떠나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정승학은 섭생이 오기를 기다리며 차일피일 떠나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결국 쾌유한 섭생이 찾아와 말했다.
"저같은 하찮은 사람을 이리 기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다행히 따라갈 수 있게 되었으니 가까이서 모시겠습니다."
정승학의 고향에 도착한 섭생인 그길로 정승학의 아들인 재창의 스승이 되었다.
재창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열여섯이 되도록 글을 짓지 못했는데,
섭생의 가르침을 받자마자 명문장을 쏟아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재창은 섭생의 가르침 덕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섭생은 드디어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말했다.
"드디어 정공의 은혜를 빌어 한을 풀었습니다.
저는 제 글을 알아주는 지기를 얻었으니, 관직에 나가지 못했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승학은 섭생에게 과거를 보라고 강권했고,
일년 뒤에 섭생은 드디어 시험에 합격했다.
시험에 합격한 섭생은 수년만에 고향집을 찾았는데,
버려뒀던 아내가 그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손에 든 것을 내팽게치고 달아나버렸다.
'아무리 무심한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도망간 아내에게 다가간 섭생이 말했다.
"겨우 3~4년 못 봤다고 이렇게 매몰차게 대하는 거요?
나도 이제 과거에 합격해 귀한 몸이 되었으니 이제 잘 지내봅시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당신은 벌써 3년 전에 죽었소.
돈도 없고 아이도 어린 탓에 시신을 그대로 두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긴 했지만-
이제 아이도 제법 컸으니 곧 장례를 치뤄줄 테니,
이렇게 귀신이 되어 나타나서 놀래키지 마시오."
아내의 말에 깜짝 놀란 섭생이 방에 들어가보니
정말 자신의 시신이 방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뿔싸!
하는 사이 섭생은 어느새 방에 누운 시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그가 입고온 온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정승학은 섭생이 죽어서도 자신에게 은혜를 갚은 것을 알고는 후하게 장례를 치뤄주었고,
섭생의 아들에게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식스 센스가 연상되는 이야기로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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