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은 공자의 후손이었는데, 인품이 있는데다 시를 잘 지었다.
하루는 친한 친구가 천태현의 현령이 되었다며 초대했는데,
초대에 응해 그곳으로 가보니 아뿔사 친구는 갑자기 숨을 거둔 상태였다.
친구에게 노잣돈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린 공생으로서는 난감한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었던 공생은 근처의 보타사라는 절에 얹혀 살면서 경전을 베끼는 일로 연명하고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인근에 있는 선씨 집안의 저택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곳은 선씨가 소송에 휘말려 가세가 기울면서 시골에 가는 바람에 비어 있는 집이었다.
그런데 비어있던 집에서 한 소년이 나오더니 공생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올리며 자기 집에 들러달라고 부탁했다.
소년이 귀품있게 잘 생긴데다 공손하기까지 한 것이 마음에 든 공생은 알겠다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공생에게 소년이 말하길
"서당을 열어 학생을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저 같은 타향 사람을 믿고 자식을 맡길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저부터 제자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받아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다만 저는 스승이 되기 모자라니 친구가 되어주십시요.
그나저나 이 집은 어찌 그리 오래 비어있었습니까?"
"여긴 선씨 집안의 저택인데, 선 선생이 낙향하는 바람에 그리되었습니다.
저는 황보 성을 가진 사람인데, 이 집을 빌려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담소를 나누다 그대로 잡들어버렸다.
다음날 공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한 동자가 와서 말했다.
"주인 나리가 오셨습니다."
공생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니 백발 노인이 다가와 말했다.
"선생께서 제 모자란 자식을 받아주셨으니 감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쪼록 잘 가르쳐주십시요."
말을 마친 노인은 술과, 음식, 값진 물건으로 공생을 극진히 대접했다.
술자리가 이어지자 황보 공자(소년)는 동자에게 말하길
"부모님이 잠드셨으면, 슬쩍 향노를 불러오거라."
잠시 뒤 동자는 아리따운 시녀 하나와 같이 나타났는데,
시녀는 신기한 솜씨로 비파를 연주하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었다.
다음날부터 학문에 정진하니,
황보 공자는 금방 큰 성과를 보였다.
그 와중에도 오일에 한번씩은 향노를 옆에 끼고 술을 마셨는데,
공생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본 황보가 말했다.
"형님께 곧 걸맞는 신부를 물색해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꼭 향노 같이 아름다워야 하네."
"견문이 좁으면 신기한 것이 많다고 하더니, 딱 그대로군요.
향노 같은 아이는 널렸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도록 바깥에 나가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공생이 대문을 열려고 하니 문은 바깥에서 잠겨 있어 열리질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니 황보는 쓸데 없는 손님을 들이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생은 가슴에 종기가 생겼는데,
이것이 며칠 사이에 밥그릇만한 크기로 커졌다.
공생은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는데,
황보가 아무리 극진히 간호를 해도 차도가 없자 부친에게 부탁했다.
"교나 누이를 불러와야겠습니다. 아니면 이 병을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며칠 가지 않아 교나가 도착했는데,
그 아픈 와중에도 공생은 교나의 자태에 홀딱 반해버렸다.
교나가 직접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니 공생은 그것만으로도 고통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진맥을 마친 교나는 손목에 찼던 금팔찌를 종기 부위에 갖다대고 누르더니,
종기가 그 속에서 부어오르는 순간 칼을 꺼내 종기를 질렀다.
썩은 피가 사방으로 흘러넘쳤지만 교나에게 마음을 빼앗긴 공생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교나가 입 속에서 구슬을 꺼내어 환부에 대고 문질러니 공생의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았다.
공생은 그날로 교나에 대한 생각으로 넋이 나가 있었는데,
그것을 눈치 챈 황보 공자가 말했다.
"형님을 위한 배필감을 찾았습니다."
"누구인가?"
"저의 친척입니다.
"필요 없네.
푸른 바다를 보았으니 다른 물이 무슨 소용이며,
무산이 아니라면 내가 찾는 구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교나는 제 하나뿐인 누이인데다, 나이가 너무 어립니다.
저한테 아송이라는 사촌 누이가 있는데 올해 나아기 열여덟입니다.
생김새나 인품이 제법이니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남자의 마음도 갈대와 같은 법. 공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정원을 거니는 아송을 본 공생은 흡촉해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맵게 되었다.
잘 살고 있던 공생에게 황보 공자가 황급히 다가오더니 말했다.
"안타깝게도 선 씨 집안에서 다시 이 집에 오겠답니다.
집을 비워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섬서 지방으로 돌아가야 하니 다시 뵙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형님은 고향으로 보내드릴 테니 걱정마십시요."
황보 공자의 아버지가 나타나더니 황금 백 냐응ㄹ 건네주며 눈을 감으라고 청했다.
공생이 눈을 감으니 몸이 떠오르더니 곧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습니다."
노인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정말로 고향 산천이 펼쳐졌다.
그제야 공생은 황보 집안의 가솔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공생은 어머니에게 며느리를 소개했고,
노총각 아들의 결혼 소식에 어머니는 아주 기뻐했다.
공생은 과거에 합격하고 아들도 얻어 흡족한 삶을 누리다가,
조정에서 나온 사람의 비위를 거스러는 바람에 파직되었는데-
하루는 교외를 거닐다 황보 공자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황보 공자의 집을 방문해보니 그의 부모님은 어느새 돌아가셨고,
동생인 교나는 시집을 간 상태였다.
다음 날 공생이 아니인 아송과 함께 황보 공자의 집을 찾았더니,
마침 와 있던 교나는 공생의 아들을 안아올리며 아송에게 말했다.
"언니는 우리 종족의 씨를 어지럽혔군요."
공생이 그녀에게 자신의 병을 치료해준 것에 대해 지나치게 감사하자,
"형부는 지위가 높은 분이십니다. 상처는 벌서 아물었는데 그 아픔을 잊지 못하시는 건 아니죠?"
교나가 이틀 밤을 더 머물고 남편과 함께 돌아가자
황보 공자가 공생에게 와 말했다.
"하늘이 우리 집안에 재앙을 내리려고 합니다.
우리를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영문을 모를 말이었지만 공생은 그간의 은혜를 생각해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황보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
"사실은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여우입니다.
오늘 닥쳐올 재앙은 저희로서는 막을 수가 없는데,
형님께서 온 몸으로 맞서주신다면 우리 일가족은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공생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들을 지켜주겠노라고 대답했다.
"천둥번개가 쳐도 움직이면 안됩니다."
공생은 황보 공자가 건네준 칼을 들고 대문 앞을 지켰는데,
곧 먹구름이 몰려들어 해를 가리더니 밤처럼 캄캄해졌다.
그러자 자신이 지키던 저택은 온데간데 없고,
커다란 여우 구멍 하나가 파져 있을 뿐이었다.
곧이어 산을 뒤흔드는 천둥 소리와 함께 안개 속에서 한 괴물이 나타났다.
날카로운 이빨과 긴 손톱을 가진 괴물이 구멍 속을 손을 집어넣더니 한 사람을 꺼내어 하늘로 올라갔다.
공생이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생명의 은인인 교나를 닮아있었다.
분을 참지 못한 공생은 괴물을 쫓아가 칼로 찔렀고,
그 순간 벼락이 떨어지며 그대로 공생을 강타했다.
사람인 공생으로서는 벼락을 맞고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잠시 후, 날이 개자 정신을 차린 교나가 옆에 죽어 있는 공생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나 때문에 공 선생이 죽었군요. 그런데 제가 살아 있다니-"
어느새 송낭이 나타나자 교나는 송낭과 함께 공생의 시신을 집안으로 옮겼다.
금비녀로 공생의 입을 벌린 교나는 손으로 그의 뺨을 꼬집으며,
혀로 붉은 구슬을 꺼내어 공생의 입속으로 굴려넣었다.
그녀는 그대로 입술을 맞대고 그의 입에 숨을 불어넣었는데,
붉은 구슬이 공생의 몸 속을 오르내리자 이윽고 공생은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후에 공생과 교나 두 사람은 연인도, 부부도 될 수 없었지만,
평생을 함께 교류하며 벗으로 지냈다고 한다.
(영화 천녀유혼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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