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전설처럼 세계 곳곳의 신화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화 중 하나가 정착 신화다.
즉, 누군가가 살기 어려운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어딘가 좀 더 살기 좋은 환경 혹은 살아갈 수 있는 땅에 정착하는... 건국 신화보다 약간 앞단계라고 해야할 듯.
그리스 신화에도 카드모스의 테베 건설이나, 아이네이아스의 로마 정착 이야기가 있는데,
중국의 파족이 사천성 동북쪽 언저리에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파족은 원래 남방에 있는 무락종리산(지금의 중국 한가운데쯤 있는 이창 지방의 청강 하류에 있는 산인듯하니, 옛 중국은 북경을 중국의 가운데라고 생각한 탓인 듯 함)의 동굴에서 살고 있었는데,
모두 다섯 개의 동굴에 파씨, 번씨, 심씨, 상씨, 정씨 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의견이 맞질 않은데다 통솔할 수 있는 대표가 없었던 탓에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싸움 탓이 인구가 늘어나기는 커녕 인구가 줄어들 지경에 이르자 일족의 노인들로 구성된 원로회에서 다섯 일족들의 대표를 선출해서 그가 전체 부족들을 이끌 수 있도록 하기로 합의했다.
각 일족은 각각 대표를 선출했고, 선출된 다섯 명의 일족 대표들이 겨루게 되었는데,
파씨 족의 대표로 무상이라는 자가 뽑혔다. 대표들간의 시합은 두 경기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절벽 건너 동굴에 단검을 던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단검 던지기 승부에서 다른 네명은 모두 동굴 근처도 못가서 단검이 떨어져버렸지만,
무상이 던진 단검만은 절벽 너머 동굴 위에 보기 좋게 꽂혔다.
두 번째 시합에서 특이한 점은 강을 건너는 배를 진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진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니 진흙이 물에 녹아내리는 것이 당연지사.
네명 모두 강을 건너기도 전에 배가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무상은 진흙에 코팅하는 법을 알았는지 무사히 강을 건널 때까지 배가 가라앉지 않았다.
일족들은 무상이 대표가 되는데 모두 승복했고, 이로서 무상은 다섯 일족을 대표하는 늠군이 되었다.
늠군이 대표가 되자 서로 싸우는 일 없이 협력이 척척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산의 동굴이 너무 좁고, 산에서 나는 것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워졌다는 점이었다.
늠군은 더 이상 산에서 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일족 모두를 이끌고 모다 살기 좋은 땅을 찾아 나섰다.
일족들은 모두 나무로 배를 만들어 강을 따라 살 곳을 찾아 다녔는데,
어느날 염수가 지나가는 염양지방(중국 충칭 서남쪽 언저리인듯)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염수를 지배하는 여신이 살고 있었는데,
이 여신은 일족을 끌고 나타난 늠군의 모습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녀는 늠군에게 염수에는 물고기도 소금도 풍부하게 나니, 그곳에 살 것을 청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일족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늠군은 다시 길을 떠나고자 한다.
하지만 사랑에 눈먼 여신은 늠군이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날벌레로 모습을 바꾸어서 세상의 모든 날벌레들을 불러모아 하늘을 뒤덮어버렸다.
(오딧세이를 연상시키는 스토리죠?^^)
늠군 일행은 하늘을 뒤덮은 날벌레 때문에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 길을 떠날 수 없게 되었고, 이런 상황이 며칠 간 계속되자 늠군의 고민이 깊어졌다.
늠군 역시 여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해치고 무작정 길을 떠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늠군은 일족의 대표로서의 책임감에 무게를 둔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아서 그녀에게 전하며, 사랑의 징표이니 항상 간직하라고 일렀다.
사랑에 눈먼 여신은 좋아라 하며 머리카락을 간직한 채, 사랑하는 이가 떠나지 못하도록 날벌레로 변해 날아다녔다.
늠군이 날벌레 떼를 보고 있자니, 한마리만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날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활을 당겨 그 벌레를 맞추었고, 여신은 강물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져버렸다.
날벌레들이 모두 흩어졌지만, 늠군은 여신에 대한 안타까움에 염수를 하염없이 쳐다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길을 떠났다.
다시 길을 떠난 늠군 일행은 묘한 기운이 감도는 골짜기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마치 아주 커다란 동굴 같은 곳이었다.
동굴을 떠나 넓은 거주지를 찾아 헤매던 늠군으로서는 눈앞이 캄캄한 일이었다.
골짜기를 넘어갈 수도 없고, 동굴에서 그냥 살 수도 없는 상황.
하지만 늠군이 신세를 한탄하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절벽이 무너지며 돌계단이 나타났다.
일행이 돌계단을 올라가니 넓고 평평한 들판이 펼쳐지고 그 주변은 숲으로 둘러 쌓여있는, 그야말로 그들이 찾아헤매던 거주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자는 심정으로 그곳의 큰 바위 윙에서 늠군 일행이 회의를 시작하며,
그곳에 도시를 세우는 비용을 산출하기 위해 대나무 조각들을 늘어놓자,
그 조각들이 바위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들은 이곳에 정착하라는 계시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도시를 세우고,
이성(지금의 충칭-중경-인듯. 그런데 무락종리산에서 염양, 그리고 충칭에 이르는 동선이 조금 이상하긴 하다. 이야기에 충실하자면 가릉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 난충쯤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은...)이라고 이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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